고전시대의 건축물을 통한 보티첼리의 예술가

1. 보티첼리 시대의 미술

우리는 15세기 말 보티첼리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까지 살펴보았다. 이 탈리아 사람들은 15세기를 그 특유의 말솜씨로 콰트로첸토, 즉 400년대 라고 부른다. 16세기, 즉 친퀘첸토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 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등 기타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우리는 이런 거장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시대에 태어 났는지 의문이 들겠지만, 이런 질문은 하기는 쉬워도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천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차라리 천재의 존재를 즐기는 편이 좋다. 이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의 전성기라고 불리우는 이 위대한 시기를 완전하게 설명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들이 이렇게 많은 천재들을 일시에 갑자기 개화시킬 수 있었는지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의 시작을 이미 조토의 시대에서 보아왔다. 당시 조 토의 명성은 대단했으므로 피렌체 자치주에서는 그를 지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 고 서로 이 유명한 대가에게 그 도시의 대성당들의 종탑 설계를 위촉하려고 애를 썼다.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영원히 남을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확보하고자 경쟁을 벌였던 이들 도시가 가졌던 자부심은 거장들로 하여금 서로 남보다 뛰어나고자 노력하게금 자극을 주었다. 이탈리아에 비해 도시 들이 누렸던 자유도 제한되었고 지역적 자부심도 강하지 못했던 북유럽의 봉건 영주의 나라에서는 이런 자극이 이탈리아만큼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 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2. 독립적인 거장들의 야심

더 이상 그들은 신발이나 찬장이나 그림 등을 가리지 않고 주문만 받으면 즉각 수행할 차비를 갖추고 있는 그런 장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이러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불만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속물들인 귀족들은 머리를 가지고 일하는 시인은 우대하면서도 손으로 일하는 미술가는 결코 대접하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미술가들을 분발시킨 또 하나의 도전이자 자극이었다. 그들은 번창하는 공방의 존경받는 우두머리로서 만이 아니라 독특하고 귀중한 재능을 가진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그들 자신을 독려했다. 그것은 당장 성공할 수 없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사회에 만연된 속물 근성과 편견은 깨트리기 힘든 단단한 벽이었다. 라틴어를 말하는 하자나 경우에 따라 능숙한 화술을 구사할줄 아는 하자는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청하면서도 화가나 조각가에게 이와 같은 특전을 배우는 데는 주저하였다. 그러나 미술가들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역시 이들 후원자들이 갖고 있는 명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탈리아에는 명예와 특권을 얻고자 안달이난 군소의 궁정들이 많이 있었다. 훌륭한 건물을 짓는 다거나 화려한 무덤을 조성하도록 주문한다거나, 대규모 프레스코의 제작을 의뢰 하거나 유명한 교회의 높은 제단에 그림을 봉헌하는 일 등은 그 사람의 이름을 영원히 남게 하고 이승에서의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 으로 간주되었다. 가장 유명한 거장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많은 도시들이 경쟁했으므로 거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미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은 군주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거의 지나가고 그 역할이 거꾸로 바뀌게 되었다.

3. 고전 시대의 건축기술 탐구

미술가가 주문을 수락함으로써 부유한 왕자나 군주 에게 호의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마음대로 주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그들의 작품을 고용주의 변덕과 기분에 맞추어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새로운 힘이 미술을 위해서 순수한 축복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 결정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여하간에 처음에는 이것이 엄청난 양의 억눌려 있던 에너지를 방출하는 해방의 효과가 되었다. 마침내 미술가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루넬레스키시대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 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의 기둥 양식에 적용했던 법칙들, 즉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 기둥 과 엔타블레이처의 올바른 비례와 치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고대의 유적들을 찾아가 측량해야 했다. 또한 비트루비우스와 같은 고전 시대 저술가들의 필사 본을 열심히 탐구해야 했다. 그리스와 로마 건축가들의 관례들을 편찬한 비트루비 우스의 저작은 재능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이라도 파악하기에 어렵고 애매한 대목이 많았다. 건축 분야만큼 후원자의 요구와 미술가의 이상이 극명하게 갈등을 일으킨 분야도 없었다. 이 학식 높은 거장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한 일은 신전과 개선문을 짓는 것이었지만 후원자들은 그들에게 도시의 궁궐과 교회의 건축을 요구했던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알베르티와 같은 미술가들이 이 본질적인 갈 등 속에서 어떠한 절충안을 내놓았는지 살펴보았다. 알베르티는 고대의 기둥 양식을 근대 도시의 궁전에 결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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