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들어내는 마법같은 기법

1. 마술 붓이 만들어내는 그림의 요술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의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른쪽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인물이 약간 더 커 보이거나 혹은 몸을 더 세우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또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얼굴의 양면이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레오나르도가 이 모든 트릭을 끝없이 사용하였다거나 살아 있는 육체를 거의 기적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자연으로부터 대담한 이탈을 상쇄시키지 못했다면, 위대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교묘한 요술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손을 모델링한 방법이 나 섬세하게 주름잡힌 소매를 묘사한 방법을 보라.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레오나르도는 어느 선배 못지 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초상화를 보았다. 왜냐하면 미술가가 형상을 보존함으로써 그가 묘사한 사람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 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는 그의 마술 붓으로 색채 속에 불어넣는 주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그렇게 빛나게 한 두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 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죽은 뒤로 45년을 더 살았다. 그의 긴 생애 동안에 그는 미술가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도 다른 장인들과 같은 훈련 기간을 지냈다. 그는 13살의 소년으로 콰트로첸토 말엽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분주한 공방에 들어가 3년간 도제 생활을 했다.

2. 기를란다요 작가의 그림 기법

기를란다요는 천재적인 작가의 위대함보다는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흥미있게 반영해주는 작품들을 담겨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마치 그의 후원자 였던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의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서 방금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재미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으로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축하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여기서 15세기 말의 한 화려한 저택의 내부와 상류 사회 숙녀들의 의례적인 방문 장면을 보게 된다. 기를란다요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과 눈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미술의 테마를 좋아했는데 실내의 배경에 고전 양식으로 춤추는 아이들의 부조를 그려놓은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그의 공방에서 작업에 필요한 모든 기술적인 수법과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확고한 기법 및 소묘의 철저한 기초를 모두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미켈란젤로는 이 성공적인 화가의 공방에 안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미술에 관한 그의 이념은 전혀 달랐다. 그는 기를란다요의 안이한 방법을 배우는 대신 조토, 마사초, 도나텔로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과 메디치가의 소장품에서 본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공방을 나왔다. 그는 근육과 힘줄을 가지고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고대 조각가들의 비법을 깨닫고자 하였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해부학의 법칙을 고대 조각만을 통해서 배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고 직접 소묘하며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인체 해부학에 관한 다름대로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인간을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혹적인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이 하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분투노력하였다.

3. 피렌체시의 역사와 완성되지 않은 그의 작품

그의 집중력과 기억력은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얼마 안가서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세나 동작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사실 상 어려움은 단지 그의 관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콰트로첸토의 위대한 미술가들도 실감나게 표현하는데 실패할까봐 그림에 도입하기를 꺼려했던 자세와 각도는 오히려 그의 예술적인 야심을 일깨우게 했던 것이다. 곧 이 젊은 미술가가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에 필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미술학도들이 해부학과 나체화, 원근법 및 소묘의 모든 기교를 배우기 위해서 여러 해를 미술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이래로 별 야심없는 상업 미술가 들일지라도 모든 각도에서 인체를 그리는 재주를 쉽게 터득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미켈란젤로의 단순한 솜씨와 지식만으로도 당시에 큰 감탄을 자아냈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30살이 될 무렵 그는 천재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거장들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시는 영광스럽게도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시의 역사와 관련된 일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이 두 거장들이 명예를 걸고 경쟁한 것은 미술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피렌체 시민들이 흥분 속에서 그들의 밑그림과 준비 작업의 진척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1506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되돌아 갔으며 미켈란젤로는 그의 열정에 다시금 불을 지른 또 하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로마로 초청하여 기독교 세계의 대왕에 상응하는 자 신의 영묘를 세우게 했던 것이다. 앞서 우리는 위대한 포부를 지녔으나 무자비한 이 카톨릭 교회 통치자의 야심적인 계획에 관해 들은 바 있으므로 대담한계획을 수행할 수단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매혹되었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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