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대리석에도 혼을 불어넣는 작품세계

1. 차갑고 생명력 없는 작품에 불어넣는 영혼

시스티나 천장화에서의 엄청난 작업 끝에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이 고갈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로 작업할 수 있게 되자 그의 능력은 더욱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에서 힘찬 젊은이의 아름다운 육체 속으로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반면에 죽어가는 노예에서는 생명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되는 순간을 선택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데서 해방되는 이 마지막 순간, 이 피로와 체념의 몸짓 속에 말할 수 없이 지극한 아름다움이 도사리고 있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원작 앞에 서보면 그것이 차갑고 생명력 없는 조각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이 조각상은 우리들 앞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또한 편안하게 쉬고 있는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미켈란젤로가 노렸던 효과일 것이다. 그가 조각한 인체들은 제아무리 격렬하게 몸을 뒤틀고 돌리고 있다해도 전체적인 윤곽은 언제나 확고하고 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 이것이 수세기동안 많은 경탄을 모아온 그의 예술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대리석속에 인물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조각가로서 그가 해야 할일은 단지 그들을 덮고 있는 돌을 제거하기만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때문에 언제나 조각상들의 윤곽속에는 본래의 대리석 덩어리의 단순한 형태가 반영되어 있어서 그 인물상에 제 아무리 많은 동작이 포함되어있다 하더라도 명료한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청했을때 이미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이 작품들을 완성시킨 뒤에는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누려보지 못했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명성은 그에게 일종의 저주와 같은 것으로 되어가기 시작했다.

2. 까다롭게 변해가는 그와 그의 작품

왜냐하면 그의 청춘 시절의 꿈이었던 율리우스 2세의 영묘를 완성할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율리우스 2세가 죽자 다른 교황이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미술가인 그의 봉사를 요구해왔고 또 그 뒤를 이은 역대 교황들도 이전의 교황보다 더 열렬히 자신의 이름을 미켈란젤로의 이름과 연결시키고자 열망하였다. 그러나 군주들과 교황들이 이 늙어가는 거장의 봉사를 얻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내면 속으로 들어갔으며 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가 쓴 시들은 자신의 예술이 죄스러운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무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대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퍽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술가의 지위는 그가 젊은 시절에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실제로 그는 7세 때에 한 이탈리아인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 편지를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그에게 전하시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단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통하고 있으니까 나는 공방을 경영하고 있는 화가나 조각가인적은 한번도 없었소 내가 교황들 봉사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소. 이러한 자랑스러운 독립성을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때 그의 적이기도 했던 브라만테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둥근 지붕을 씌우는 일로 만년에 그가 맡았던 최후의 이 거창한 작업에 대한 보수를 거절했다.

3. 딱딱하지 않은 작품과 대칭구도

이 늙은 거장은 기독교 세계의 총본산인 이 대성당을 위해 한 일을 세속적인 이윤으로 더럽혀서는 안될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봉사로 간주 했던 것이다. 원을 그리며 둘러선 이중의 열주들이 받쳐주는 것 처럼 보이는 이 거대한 둥근 지붕은 깨끗하고 장엄한 윤곽으로 로마시의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불렀던 이 비범한 미술가의 영혼에 가장 적합한 기념물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바로 라파엘로 알려져있는 라파엘로 산티였다. 그는 소위 울브리아 파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미켈란젤로의 스승 기를란다요나 레오나르도의 스승 베로키오와같이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도 주문 받은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페루지노는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통해 일반적인 인기 줄 솜씨 좋은 많은 도제들을 필요로 했던 대단히 성공한 미술가들의 대열에 속하 그처럼 열심히 씨름했던 문제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이전의 콰트로첸토의 미술가들이 어쨌든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 중에는 그가 전체적인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깊이를 묘사하는 방법과 인물들이 거칠고 딱딱하게 보이지 않 도록 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를 구사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봉헌된 제단화이다. 성자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성모를 보기 위해 책을 보던 것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구성이 그토록 단순한데도 거의 완벽한 좌우 대칭의 구도에는 딱딱하거나 무리가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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