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세계

1. 홀바인의 성모상과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들

칼빈교도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이런 것이 교리상 허용된 지역에서 도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양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그런 대규모의 프레스코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홀바인은 뒤러 보다는 스물여섯 살 아래이고 첼리니보다는 불과 세 살 위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긴밀한 교역 관계에 있었던 부유한 상업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곧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였던 바젤로갔다. 이렇게 해서 홀바인은 뒤러가 평생 동안 그처럼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지식을 좀 더 손쉽게 습득했다. 홀바인은 화가 집안 출신인 데다가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마 안가서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가들 의 업적을 모두 다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서른 살쯤 되었을 때 바젤의 시장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 성모상을 그렸다.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이 윌튼 두폭화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적 형태의 감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반니 벨리니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2. 궁정화가 홀바인의 다양한 활동범위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 사용권 나라에서 정상을 향한 길을 다지던 그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쳐 이러한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다. 그는 1526년에 위대한 학자인 로 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의 추천서를 받아서 스위스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여기서는 예술이 얼어 죽어가고 있소 이것은 토머스 모어 경을 비롯한 그의 친 구들에게 이 화가를 추천한 글에서 에라스무스가 한 말이다. 영국에 도착한 후 홀바인이 처음 한 작업은 또 다른 위대한 학자인 토머스모어 경의 집안 식구들을 담은 대형 초상화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위한 부분적인 습작 몇 점은 아직도 윈저궁에 보존되어 있다. 만약 홀바인이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서 피하려고 했다면 그 뒤에 일어난 일로 인해 실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영국에 정착하기로 했고 헨리 8세로부터 궁정 화가라는 공식 직함을 받게 되자 드디어 자기가 몸담고 일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를 찾게 되었다. 그는 더이상 성모상을 그릴 수는 없었으나 궁정화가의 일은 매우 다양했다. 그는 보석과 가구, 연극 의상, 그리고 실내 장식뿐만 아니라 무기나 술잔까지 디자인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헨리 8세 시대 의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홀바인의 끝없는 통찰력 때 문이라 할 수 있다. 헨리 8세의 신하로 수도원의 해체에 참가했던 관리 리처드사우스웰 경의 초상화이다. 홀바인의 이런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보이는 것 같다.

3. 르네상스 시대작가들의 조화로운 구성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 성모상을 그렸다.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이 윌튼 두폭화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적 형태의 감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 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조반니 벨리니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 사용권 나라에서 정상을 향한 길을 다지던 그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쳐 이러한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다. 그는 1526년에 위대한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의 추천서를 받아서 스위스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여기서는 예술이 얼어 죽어가고 있소 이것은 토머스 모어 경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이 화가를 추천한 글에서 에라스무스가 한 말이다. 영국에 도착한 후 홀바인이 처음 한 작업은 또 다른 위대한 학자인 토머스모어 경의 집안 식구들을 담은 대형 초상화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위한 부분적인 습작 몇 점은 아직도 윈저궁에 보존되어 있다. 만약 홀바인이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서 피하려고 했다면 그 뒤에 일어난 일로 인해 실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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