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도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작품세계

1. 미완성의 완성인 그의 작품의 세계

이러한 견해가 레오나르도와 그의 후원자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누구나 그림을 주문할 수 있는 공방의 주인쯤으로 여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에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그가 맡은 주문을 완성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가 주문자의 성화 같은 재촉에도 불구하고그림을 미완의 상태로 내버려두곤 했다. 더군다나 그는 작품의 완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그가 작품에 만족하지 않으면 작품을 내놓기를 거절했다. 그렇기때문에 레오나르도의 작품 중에서 완성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도 이 불세출의 천재가 여기저기 쉴세 없이 옮겨다니며 시간을 허비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는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밀라노에서 다시 피렌체로 옮겨다녔으며 악명높은 모험주의자 체사레 보르자 밑에서 일하다가 로마로 그리고 마침내는 프랑스의 왕 프랑 수아 1세의 궁정에서 1519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이해받기보다는 찬탄과 존경을 더 많이 받았다. 불행하게도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원숙기에 완성시킨 몇 개의 작품들만 이 보존 상태가 대단히 나쁜 채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레오나 르도의 유명한 벽화의 잔영을 볼 때는 수도사들을 위해서 그려진 이 그림이 당시에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졌을지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는 어떠하였으며, 또 수도사들의 긴 식탁과 나란히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식탁이 벽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눈앞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성경 이야기가 이처럼 가깝고 실감나게 그려진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또 하나의 홀이 수도사의 홀과 이어져 그 안에서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지고 손을 대면 만져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었으리라.

2. 최후의 만찬의 입체감 그의 비범함

식탁 위에 떨어지는 빛은 얼마나 또렷했으며 또한 그 빛이 얼마나 인물들의 입체감을 살려주었을까? 아마도 수도승들은 식탁 위에 있는 접시나 의상의 주름 등의 모든 세부가 실감나게 묘사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일반인들은 미술작품을 그것이 실물을 어느정도 닮았느냐에 따라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첫 반응에 불과했으리라. 수도승들은 그림이 현실로 나타난 듯한 환상에서 깨어 그 비범함을 충분히 감탄한 뒤에는 레오나르도가 어떤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끌고 갔는지에 눈을 돌렸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들 전통적인 그림들에서는 사도들이 식탁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예수는 조용히 성찬을 나누어주고 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는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조토처럼 성경의 본문으로 돌 아가서 예수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라고 하자 사도들이 너무 슬퍼서 모두가 예수께 주여 나니이까? 라고 말하는 장면이 과연 어떠했을까를 눈 앞에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요한 복음에는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보라고 하였다라는 대목이 추가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운동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이 질문과 몸짓이었다. 예수는 방금 비극적인 말을 했고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 계시를 듣고 공포에 놀라 뒤로 움츠리고 있다. 어떤 사도는 그들의 사랑과 죄없음을 호소하는 것 같고, 또 산타마리아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를 지칭했는지를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 다른 사도들은 예수가 방금 말한 것을 설명해달라고 예수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중에 성미가 급한 성 베드로가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성 요한에게 달려간다.

3. 완벽한 예술을 이해하는데에 걸리는 시간

그가 무엇인지를 성 요한의 귓속에 속삭일 때 무심코 유다를 앞으로 떠밀어 유다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지는 않았으나 고립되어 보인다. 유다만이 몸짓도 하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는 몸을 젖히며 의심과 분노에 찬 모습으로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의 모습은 이 갑작스러운 소란 속에 조용히 체념한 듯 앉아 있는 예수의 모습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 모든 극적인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는 완벽한 예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예수의 말이 야기시킨 흥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혼란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 아마도 우리가 폴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아누를 설명할 때 논의했던 문제를 돌이켜본다면 구성에 있어서의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완전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폴라이우올로 시대의 미술가들이 사실성과 도식화의 요구를 결합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폴라이우올로의 해결책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딱딱하고 인위적이었는지도 기억한다. 폴라이우올로보다 약간 젊었던 레오나르도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장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지 못해도 여전히 이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면 구성을 즐길 수 있다. 이 구성은 고딕회화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이나 보티첼리와 같은 화가들 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작품 속에서 회복시키려고 했던 그러한 무리 없는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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