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에 필적하는 비운의 화가 조르조네

1.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림 세계를 따뜻함으로 채운 화가

그는 페루지노가 어느정도 그랬던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인물의 다양성과 개성을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꿈꾸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성 카타리나나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늙은 학자인 성 히에로니무스는 각기 그들 나름대로 실감나게 그려져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페루지노의 인물 못지않게 보다 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세계, 즉 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는 충만한 따뜻함과 초자연적인 빛이 스며든 세계에 소속된 사람들같이 보인다. 조반니벨리니는 베로키오,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과 같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으로 이 세대들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유명한 친퀘첸토의 거장들이었다. 그 또한 대단히 바쁜 공방의 우두머리였는데 그의 공방에서는 친퀘첸토의 유명한 베네치아 거장인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를 배출했다.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완전한 화면 구성과 균형잡힌 구도로써 그들의 그림 속에 새롭고 완전한 조화를 이룩했다고 한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색채와 빛을 그처럼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조반니가 보여준 모범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화가 조르조네는 바로 이런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사람이다. 이 미술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진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겨우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 들만으로도 그는 새로운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못지 않는 명성을 충분히 굳혔 다. 이상하게도 이들 그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의 하나인 폭풍우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어떤 고전 작가나 고전을 모방한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한 장면을 그 린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베네치아 미술가들은 그리스 시인들과 그들이 추구했던 것의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원의 사랑 을 다룬 목가적인 이야기나 비너스와 요정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를 좋아했다.

2. 배우들이 살아 움직이는 풍경이 되는 그림

언젠가는 이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가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 이야기는 장래에 영웅이 될 아기의 어머니가 아기와 함께 도시에서 쫓겨나 황야에 버려졌는데 마침 친절한 젊은 목동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어쩌면 조르조네가 표현하고자 했던바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이 작은 도판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이것으로도 어렴풋이 그의 혁명적 업적의 편린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특별히 세심하게 그려진것도 아니고 구도에서도 별다른 기교가 엿보이진 않지만 이 그림은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 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또한 이 그림이 그 시초일 듯 싶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인물들로부터 이 작은 패널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풍경을 번갈아 살펴보며 조르조네가 그의 선배나 동시대 화가들과는 달리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3.  거침없는 소묘 솜씨를 가진 화가 조르조네

조르조네는 이 위대한 발견의 모든 결실을 얻지 못하고 너무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성과는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티치아노를 통해 얻게 되었다. 티치아노는 알프스 남부의 카도레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가 흑사병으로 죽을 때는 9세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긴 생애 동안에 그는 미켈란 젤로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기 작가들은 황제 카를 5세조차도 그가 떨어트린 붓을 집어줄 정도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경외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한다. 우리는 이것을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길지 모르나 그 당시의 긍정의 엄격한 규칙들을 고려해볼 때 세속적인 권세의 가장 위대한 화신이 존엄한 천재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런점에서 볼 때 이 작은 일화가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후세 사람들에게는 미술의 승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더욱이 티치아노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박식한 학자도 아니었고 미켈란젤로와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으며, 라파엘로와 같은 다재다능의 매력적인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한 사람의 화가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거침없는 소묘 솜씨에 필적하는 그런 화가였다. 이런 뛰어난 솜씨가 그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그의 미술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 성모와 성인들보다 불과 약 15년 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반니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성모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 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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