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그림들을 균형있게 만드는 창조자

1. 그림의 불안정함을 조화롭게 구성하는 라파엘로

거인의 그림은 이 홀의 다른곳에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 아름답고 유쾌한 그림을 아무리 오래 보아도 풍요롭고 복잡한 구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각 인물상은 서로 다른 인물상과 대응하며 또 다른 움직임은 제각기 그와 상반되는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폴라이우올로의 걸작에서 보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의 해결방법은 오히려 딱딱하고 둔해 보인다. 큐피드의 활과 화살을 들고 요정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작은 소년들부터 살펴보자. 하늘위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큐피드 둘은 서로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응되고 있으며 또한 수레 옆에서 헤엄치고 있는 큐피드와 그림 맨 위를 날고 있는 큐피드가 서로 대응을 이룬다. 갈라테아 주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신들의 무리도 마찬가지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조개 껍질을 불고 있는 해신이 둘 있고 그 앞쪽과 뒤쪽으로 각각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해신들이 두 쌍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탄할 점은 이 모든 다양한 움직임들이 갈라테아의 모습에 반영되어 있고 그속에 흡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타고있는 수레는 그녀의 베일을 뒤로 날리며 그녀를 싣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리고 있으나 괴이한 사랑의 노래를 듣자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미소를 짓는다. 큐피드의 화살에서부터 그녀가 잡고 있는 고삐의 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들은 바로 화면 중앙에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로 모인다. 이러한 또 하나의 미술적인 수단에 의해서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 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그의 숙련된 솜씨로 인해 후대의 미술가들이 라파엘로를 그처럼 찬양했던 것이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2.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가 요정 갈라테아를 완성했을 때 어떤 귀족이 라파엘로에게 도대체 그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어떤 특정한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콰트로첸토의 그처럼 많은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상상한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프라시텔레스의 시대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도식화된 형태에서 천천히 자연과 비슷하게 되어가면서 생겨 나게 되었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과정이 반전되었다. 미술가들은 고전 시대의 조각 작품들을 보고 자신의 머리 속에서 형성된 아름다움의 이 념에 따라 자연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모델을 이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자체로 위험을 안고 있었다. 만일 미술가들이 의도적으로 자연을 개량하려고 한다면 그의 작품은 틀에 박히거나 맥빠진 것이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라파엘로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가 어쨌든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도 이상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테아의 사랑스러움에는 도식적이거나 계산된 곳은 하나도 없다. 그녀는 사랑과 아름다움이 빛나는 더 찬란한 세계, 즉 고전 시대를 찬미하던 16세기 이탈 리아 인들에게 홀연히 나타난 고전 세계의 요정이었던 것이다.

3. 짧은인생을 살았지만 예술적인 업적을 남긴 작가

라파엘로의 명성이 수세기 동안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이름을 단지 아름다운 성모상과 고전 세계에서 이상화시킨 인물상에만 연관 지우려하는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후원자로 메디치가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가 두 사람의 추기경을 거느리고 있는 초상을 보면 아마 놀라움을 금치 못 할 것이다. 머리가 약간 부풀어오른 근시안인 교황의 초상에는 이상화된 것이 하 나도 없다. 빌로드와 비단의 다양하고 풍부한 색조들이 호사스러움과 권세의 분위기를 돋구어주나 이 사람들이 그렇게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의 세태는 어지러웠다. 왜냐하면 이 초상화가 그려진 때는 루터가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의 기금 모금 방법에 대해 교황을 공격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브라만테가 1514년 사망한 뒤 교황 레오 10세는 이 건축 사업의 책임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이렇게해서 그는 또한 건축가가 되어 교회를 설계하고, 별장과 궁궐을 짓고 또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최대의 경쟁자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그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분주한 공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사교적인 성품 덕분에 교황청의 학자들과 고관 대작들은 그를 친구로 삼았다. 라파옐로는 거의 모차르트만큼 젊은 나이인 37회 생일날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는 그의 짧은 인생 동안 놀랄 만큼 다양한 예술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 시대의 유명한 학자였던 벰보 추기경은 로마의 판테온에 있는 라파엘로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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