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화가의 등장

1. 공기와 색채로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 그림

이 두 성인은 십자가의 성흔으로 보아 알수있는 성 프란체스코와 성모의 왕좌 아래의 계단에 열쇠를 놓고있는 성 베드로이다. 이 제단화에서 티치아노는 헌납자들의 초상을 그려넣는 전통을 다시 재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의 귀족 야코포페사로가 터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기념으로 기증한것이었다. 티치아노는 페사로를 성모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렸고 갑옷을 입은 기수 한 사람이 터키 군포로 한 명을 뒤에서 끌고 오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성 베드로와 마리아는 인자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고 맞은편의 성 프란체스코는 그림의 한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페사로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아기 예수의 시선을 돌리게 하고 있다. 전체 장면은 노천 중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구름을 뚫고 치솟아있고 구름위에서 작은 두 천사들이 장난치듯 십자가를 세우는데 열중하고 있다. 티치아노 시대의 사람들은 구도의 오래된 규칙들을 과감히 뒤엎은 그 대담성에 놀랐을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있고 활기차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단순한 깃발 하나를 가지고 성모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게 한다는 생각은 아마도 그건 세대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풍요롭고 따뜻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이 깃발은 그 같은 모험을 완전한 성공으로 이끈 놀랄만한 부분이다.

2. 신비하게 영혼이 담겨있는 초상화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의 초상화의 매력을 이해하자면 일명 젊은 영국인이라고 불리우는 초상화의 머리 부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보면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힘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에서 보는 바와같은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젊은 영국인 은 모나리자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는 거친 캔버스 위에 물감을 한 점 발라놓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다. 권력자들이 이 거장에게 초상화를 그려받는 영광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실물보다 특별히 더 좋게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예술을 통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리에 있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앞에 서보면 그들은 정말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이 그림은 교회의 늙은 통치자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젊은 친척,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를 돌아다보고 있고 알렉산드로의 동생 오타비오는 조용히 우리를 쳐다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3.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명암법

티치아노는 이 그림보다 약 28년 전에 라파엘로가 추기경들과 함께 있는 교황 레오 10세를 그린 초상화를 분명 알고 있었고 또 감탄했을테지만 그는 보다 더 생생한 특성을 강조하여 라파엘로의 그림을 능가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 세 사람의 만남이 너무나 설득력 있고 또 극적이므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추기경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황이 그들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있지는 않을까? 아마 이런 것은 근거 없는 질문이 되겠지만 당시의 사람들로서도 이 그림 앞에서 이러한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티치아노가 황제 카를 5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를 떠나 독일로그의 초상을 그리러 갔기 때문에 이 그림은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 미술가들이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방법의 발견을 위해서 정진한 것은 비단 메네치아와 같은 커다란 중심지에서 뿐만은 아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소유인 파르마에서도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던 한 화가가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일명 코레조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가 있다. 코레조가 그의 대표작들을 그렸을 때 이미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는 사망했고 티치아노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당대의 미술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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