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토레토부터 북유럽의 미술 연대기

1. 틴토레토가 해석한 성경의 감동적인 미술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림의 극적인 사건으로부터 다른데로 돌려 버릴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채 내버려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이다.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은 그리스의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보통 그는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그레코로 불렀다. 그는 중세 이래로 새로운 미술이라고는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세상의 고립된 지역에서 베네치아로 건너왔다. 그는 그의 고향에서 고대 비잔틴 양식, 말하자면 실제와 비슷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엄숙하고 딱딱한 양식으로 그려진 성상들을 익히 보아왔을 것이다. 그림을 볼 때 그 묘사가 정확 한지 가려내는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틴토레토의 예술에서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고 매혹 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또한 틴토레토와 마찬가지로 격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도 성경의 이야기들을 새롭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한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렀던 그는 그 후 유럽의 외진 곳인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비평가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2. 엘그레코의 남다른해석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 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엘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만든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한 구석에서 환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하늘을 쳐다보며 예언자의 몸짓으로 두 팔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 요한이다. 다음은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 양이 성 요한을 불러 일곱 개의 봉인을 떼 는 것을 와서 보라는 대목 중의 한 부분이다.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아래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대왕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주시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또 그들은 흰 두루마기 한 벌씩을 받았습니다.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틴토레토의 한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것이고, 또 파르미자니노의 기교를 부린 마돈나에서와 같이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 남유럽 미술가들의 존폐

그러나 우리는 또 한 엘 그레코가 이 미술 방법을 새로운 목적에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비스런 종교적 열정의 나라 스페인에서 살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매너리즘의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미술은 엘 그레코의 손을 거쳐 감식가(家)를 위한 미술로서의 특징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믿기 힘들 만큼 매우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은 바사리가 틴토레토의 작품에 대해 표시했던 반감 같은 것은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들은 티치아노의 초상화에 비견될 수 있다. 그의 작업실은 항상 분주했다. 그는 그가 받은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조수들을 고용했던 것 같다. 그가 서명한 작품들 전부가 모두 고르게 훌륭하지 않은 것은 이것으로 설명이 될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사람들은 그의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와 색채를 비판하고 그의 그림을 기분 나쁜 농담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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